우리가 알고 있는 정승황희는 이름값에 비해 인간적으로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세종대왕이 사위 서달을 살해한 사건을 은폐하려다 장남과 사생아들이 재물을 누설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황희는 문종 때 정승으로 오랜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에 태어난 그의 후손들은 황희의 악명을 전혀 닮지 않고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기술로 자수성가했다.

황진은 1550년 전라도 남원에서 황희의 5대손으로 태어났다.
조선이 쇠퇴하던 명종 때 태어났기 때문인지, 재상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재상을 거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그의 가문은 더 이상 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밀어 냈다.
그래서인지 황진은 학문을 배워서 문인이 된 것이 아니라, 무술을 열심히 배워 무과에 급제하여 무학의 길을 걸었다.
과거 황진이 과거에 합격했을 때 그와 함께 합격한 사람은 훗날 황진과 생사를 같이한 이종인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황진은 북방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임진왜란 직전에 일어난 대반란인 니탕개난에 참여하여 여진족 토벌의 경험을 쌓았다.
그 후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호위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일본을 통일하고 있던 히데요시를 만난 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일본도를 사들여 무술에 매진했다. 기예.
전후에 쓴 선조실록에는 황진이 황희의 5대손으로 일본에서 돌아와 무술을 부지런히 수련했다고 한다.
이후 동복현암에 임명되어 부임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왕실군을 이끌고 한양탈환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이끄는 전라도지사 이광은 서툰 인물이었기에 와키자는 야스하루가 이끄는 기병대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패하고 만다.
용인해전에서 조선군은 모두 흩어지는 가운데 권율과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만이 힘을 잃지 않고 퇴각했다.
황실군이 패배한 후 일본군이 전라도로 쏟아져 들어오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정예군이 운치, 이치와 함께 전주를 점령했다.
웅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정담이 전사하고 이복남이 조선군을 이끌고 수비하였으나 결국 패하여 전주 근방에서 퇴각하였다.
그리고 이치에서 권율과 함께 일본군과 싸워 황진이 활을 뽑아 쏘아 수많은 왜적을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격전 속에서 일본군의 집중 공격으로 황진이 부상을 입자 조선군의 사기가 곤두박질치며 돌파를 위협했지만 권율이 전투를 독려해 간신히 승리를 거뒀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의 전라도 침략을 막았고, 조선 팔도가 일본군에게 짓밟히는 상황에서 전라도를 지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이순신이 도를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바다. 할 것이다.
웅치와 이치의 싸움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진은 전라도 수장이자 관청 3등으로 승진한다.
당시에는 서인과 동인으로 진영이 갈라져야만 승급이 가능했는데, 자신의 실력만으로 순식간에 승격되는 황진의 특기는 의외다.
이후 죽주산 성에 숨어 있던 일본 명문 후쿠시마 마사노리와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다.
거듭된 습격과 전투를 통해 결국 일본군을 성 밖으로 이끌고 매복하여 패퇴시키고 텅 빈 죽주성을 탈환하였다. 1,000명 남짓한 병력으로 칠갈창으로 알려진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제압했고, 당시 조선 조정의 지원이 더 있었다면 황진이 더 큰 공헌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이 전공을 바탕으로 충청군으로 진급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동복현암으로 보직을 맡았지만, 이순신과 비슷한 이력을 따라 결국 충청도 지역을 수호하는 충청도병에까지 올랐다. 매우 빠르게 승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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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명 | 진주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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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군은 한번 패하고 철수하면 진주성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꺾을 수 없었고, 특히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무너뜨리는 일에 몰두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진주를 공격했고, 다시 한 번 진주를 지키기 위해 전투 부분을 받아들였다.
요새에 주둔한 조선군은 3,000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일본군을 피해 각지에서 피난민이 많았고, 10만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진주 김시민 목사가 지키고 있던 진주성을 3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했으나 참패하고 다시 공격해 끊임없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또한 일본이 자랑하는 뛰어난 장군들이 모두 집결하여 작은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니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진주에 입성하기 전,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한 조선의 많은 사람들은 진주성을 방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철수를 주장하였다. 특히 곽재우는 황진을 만나 진주로 가지 않고 부대를 지키자고 제안했지만, 김천일이기에 승산이 없어보이던 싸움에 말려들었고 사람들은 이미 약속을 한 상태였다.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진주성은 황진이 이끄는 병사들에 의해 8일 밤낮을 지켰으나 안타깝게도 황진 장군의 시체더미 속에 숨어있던 일본군 저격수가 쏜 총알이 진의 머리에 박혀 사망했다.
안타까운 최후를 맞은 황진을 대신해 무과에 함께 합격한 김해군수 이종인이 그를 대신해 수성으로 갔으나 황진이 부서져 죽은 다음 날 진주성이 되고 말았다.
성을 지키던 수장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고, 이종인은 남강에 몸을 던지고 양편의 일본군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외쳤으니 정말 치열한 전투였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명으로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 안의 3만여 명이 학살당했고, 치열하게 전개된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의 참패로 끝났다.
황진이 죽은 뒤 우찬성이라는 1등을 하사했고, 조정에서도 그의 공로를 인정해 후손들에게 포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그가 지키던 성까지 함락되어 후세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전라의 이순신 장군은 진주성 함락 후 황진의 죽음을 애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큼 그가 실력을 발휘하던 중 전사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